평화영성, 평화교육

제4회 동북아시아 화해를 위한 크리스챤 포럼 강우일 주교님 발표내용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시간과 공간의 의미

 

 

 

 

4회 동북아시아 화해를 위한 크리스챤 포럼에서

일시 : 2017529- 63

장소 : 이시돌 피정의집

발표 :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카이로스 시간(the Kairos)의 의미를 성찰하기 위해, 동북아시아에서 우리가 직면한 지정학적 배경을 고찰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겠다. 동아시아 지도를 보면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국인들은 이웃한 두 강대국으로부터 자주 침략되고 억압당하면서 끊임없이 고통과 도전을 받아 왔다. 7세기에 중국 군대는 한반도 북부 지역을 수차례 침략했지만, 끈질긴 저항을 받아 정복에는 실패했다. 중국군은 13세기와 17세기에도 예닐곱 차례나 한국을 침략해서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16세기 초에 일본 군대가 한국을 침략하여 짧은 기간 동안 한국 전역을 차지한 적이 있다. 1910년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점령하기 시작해서 1945년까지 36년간이나 지배했다. 일본이 물러간 뒤, 두 동강 난 한반도의 북부는 소비에트 군대에 의해, 남부는 미국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 시기로부터 지금까지 한반도는 이념적인 갈등으로 압도되어 왔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는 몇 세기 동안이나 이집트와 북부 제국인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시리아 사이에 끼어 생활해야 했던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을 되새기게 한다. 유다 왕국 마지막 시대에, 백성들은 두 개의 집단 즉 친-바빌로니아파와 친-이집트파로 나뉘었는데,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친 이집트파를 추종하고 있었고, 치드키야 임금은 이집트의 도움에 의존해서 바빌로니아에 맞서 싸우려 들었다. 하지만 예레미야와 에제키엘 같은 예언자들은 친-이집트 정책에 비판적이었다.(예레 27-28, 에제 30-31 참조)

한반도 남쪽 해안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제주도는 10세기까지는 독립적인 왕국이다가, 그 시기 무렵 조선 왕조에 편입되었다. 제주도는 늘 정치범이나 반역자들을 귀양 보내는 동떨어진 섬으로 여겨졌다. 섬 주민들이 본토로 여행을 가려면 특별 허가를 받아야 했다. 또 제주도민들은 본토 언어와는 꽤 다른 제주 고유의 방언을 사용했다. 이제는 섬 주민 대부분이 표준 한국어를 쓰지만, 때로 연로하신 분들이 제주 방언으로 이야기 나누는 걸 들으면 정말 알아듣기 힘들다.

제주도민 절대 대수가 4?3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4?3 사건은 여전히 잘 알려져 있지 않다. 4?3은 한반도에서 일본이 퇴각한 때부터 합법적인 정권이 수립될 때까지의 혼란스러운 변혁기에 발생한 비극이었다. 2003329일에 발표한 한국 정부의 공식 보고에 따르면, 1948년부터 1954년 사이에 학살된 시민은 3만 명에 이릅니다. 과거사를 바로잡기 위해, 4?3은 하나의 국가만 연루된 사건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이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돌이켜보아야 겠다.

 

1. 4?3과 일본

1922년에 이미 일본 정부는 일본 산업 지역에 노동력을 충당할 목적으로 제주도와 오사카 사이에 페리보트 정기 운항을 시작했다. 1934년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한국인은 54,000명으로 추정됩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에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본 정부는 국가 일체 동원령을 발표해 수많은 한국인들을 일본으로 데려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일본 전역의 수많은 광산, 공사현장에서 노동하는 한국인은 100만 명에 달했다. 일본이 굴복하자마자, 제주도 출신 노동자 6만 명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로 인해 제주도는 급격하게 식량과 일자리 부족 사태를 초래했다고 한다. 2차 대전이 끝나던 해 제주도 전체 인구는 22만 명 정도였는데, 이듬해에 인구가 30% 이상 불어나게 된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은 일시적으로는 환희를 느끼게 해 주었지만, 시민들의 생활에는 곧바로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돌이켜보면 제주도 전역을 뒤흔들어놓은 4?3 이라는 파국적인 재앙의 진원은 일본과 일본의 식민지 팽창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 4?3과 미국

 

1945년 한반도 남부를 점령한 미 군사정부는 일본 식민지 아래 실시되었던 통제 경제를 철회하고 자유 시장경제를 도입한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공정하고 질서정연한 시장을 유지할 어떤 특별 조치나 경제 정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이전의 경제 체제를 해체하면서 아무 후속조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주들과 부유한 상인들에게 시장을 차지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들은 시장 질서를 파괴했다. 19459월 기준, 1말에 9.4엔이던 쌀값은 2,800엔으로 껑충 뛰어 올랐다고 한다. 다른 지역보다 더 빈곤한 상황에 있던 제주도민들은 예기치 못한 사회적 혼란을 겪어야 했다. 제주민들은 미국 정부 관료들은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행정력을 일본 식민지 정권에 기생하는 경찰력에 넘겨주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 했을 뿐이었다. 제주도민들이 미국 군사정권에 맞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경찰이 거리에서 시위하던 사람에게 발포하자, 제주도민 전체는 총 궐기로 대응했다. 미국 군사 정권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체포하고 고문하는 등 시위에 나선 주민들을 가혹하게 억압했다.

미국은 제주도의 역사, 문화, 언어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정보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지역 주민에 대해 일말의 존중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또 다른 점령자로 행동했다. 미국 군부 지도자들은 일본 제국의 식민 체제 아래서 겪어야 했던 제주 도민들의 끔찍한 고통과 굴욕적인 경험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민 대부분은 정치적인 이념과는 무관한 순박한 농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 지도자들은 그들을 오로지 공산주의자로 취급했다. 경찰이 제공하는 정보에만 의탁한 미군 지도자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제주도에서 좌익 운동을 완전히 뿌리 뽑으라는 명령만 내놓았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생존할 싹마저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초토화 정책까지 명령했다.

 

3. 4?3과 한국 정부

 

1948815, 남한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194811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발포하고 봉기 세력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할 것으로 명령했다. 초기 단계에서 무장한 반란 세력은 500명이 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남한 정권은 군대와 경찰력 뿐만 아니라 우익 활동가들까지 제주도에 보내, 산간지역에 자리 잡은 모든 마을들을 장악하고 도민들을 처형하고 불태우고 파괴했다. 고지에 거주하는 마을 주민들은 밤에는 음식과 생필품을 구하러 내려 온 무장 빨치산에게 시달려야 했고, 낮에는 군인들과 경찰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해안가 마을 주민의 경우 가족들 가운데 부재자가 있으면 빨치산과 연루된 것으로 간주되어 처형당했다. 19493월 이후, 한국 군대는 좌익을 배신하고 자수하면 사면해 주겠다고 선언했다.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빠져 나와 경찰에 자수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어떠한 법적 절차도 받지 못한 채 처형당했다. 이념적인 대립 때문에, 제주도민들은 동포가 아니라 제거당해야 할 적으로 간주되었다.

 

4. 대한민국 정부(ROK)가 취한 후속 조치

 

한국 전쟁 이후, 더 극단적인 반공주의가 된 이승만 정권은 빨갱이 반동 세력의 폭동으로 규정한 4?3 사건에 대해 조사는 말할 것도 없고 언급조차 금지했다. 19604.19 의거(학생 혁명)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자 잠깐 동안의 민주적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1961년 군부 쿠데타가 발발했다. 이후 30년간 독재 정권이 이어지면서, 4?3 사건은 깊은 망각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4?3의 기억은 소설이나 시 같은 일부 문학작품을 통해서만 남게 되었다. 4?3 비극을 암시한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투옥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2000년이 되어서야,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4?3의 진실이 밝혀졌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4?3 사건 조사 특별법을 제정했다. 50년이 지나고서야 남한에서 4?3의 봉인을 깨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이명박과 박근혜 행정부는 4?3 사건과 관련하여 명확한 분류 조사와 복권을 진행하는데 미온적이었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진실에 충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편견과 집단 이익으로 정보를 통제하고 조작하는 정치인들의 태도를 지켜보아야 했다.

 

5. 한반도에서 지속되는 갈등의 원인

2차 세계대전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은 좌()/()의 극단적인 이념 대립이 강화되었다. 1950-1952 사이에 발발한 한국 전쟁은 한국 국민들 사이에 엄청난 장벽을 가져왔다. 북한 사람들과 남한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역사적 유산과 조상을 갖고 있지만, 지금은 서로에 대해 외국인처럼 느끼고 있다. 한국 전쟁 후 몇 십 년 동안 남한에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나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말이나 행동을 했다간 자신의 사회생활을 위험에 빠뜨려야 했다.

분단 70년 사이, 북한과 남한 사람들은 서로를 주적으로 간주하고, 서로를 겨냥하며 엄청난 폭탄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발사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해마다 남한과 미국의 군사력은 북한에 맞서 합동 군사 훈련을 수행하는데 엄청난 비용을 쏟아 붓고 있다. 이에 맞서기 위해 북한이 고집스럽게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집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재정적으로 북한은 그런 막대한 규모의 군사훈련을 감행할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북한의 GDP는 남한에 비해 고작 1/40밖에 되지 않는다..

21세기 초, 남한은 중국과 미국이라는 초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다. 극동아시아의 이 위험한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세계 평화를 향한 큰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는 정확하게 두 강대국이 충돌하는 지점을 위치해 있다.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1950-52년에 벌어진 한국 전쟁에 대한 쓰라린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 전쟁으로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깊은 심리적인 불안과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갈등 때문에, 남한 시민들은 어떤 종류의 군사적인 계획에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저항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 안보라는 명분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희생할 각오를 한다. 그리스도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의문도 제기하려 들지 않다. 나는 교회가 군사력의 균형에 의존하는 것 말고는, 평화를 촉진하려는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2007, 한국 해군은 제주도의 작은 어촌 강정에 해군기지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제주의 많은 사람들은 이 일방적인 결정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강정은 DMZ(비무장지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한국 해군을 위해서라면 너무도 크고, 제주도에 이렇게 거대한 해군 기지를 새로 지어야 할 아무 이유가 없다. 해군 기지는 공군 수송기를 포함하여 20척의 최첨단 전함이 기항할 수 있는 규모로 설계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평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에 반대하여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억류되거나 투옥되고 벌금형에 처해졌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에 저항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정부 고위 인사에게 호소하는 등 모든 노력을 동원했지만, 그 과정을 통해 나는 이 일련의 조치가 한국 정부 단독의 결정이 아니라 미국 정부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음을 드러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SOFA(한미군사협정)에 따르면, 미국 군대는 한국 정부에게 미리 허가를 받지 않고도 한국 군 시설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최근에 우리는 처음으로 미국 구축함 한 대가 325일 하루, 강정에 정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이 있기 바로 전에, 미국 국방장관인 제임스

Comment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0 '서로에게 힘을 북돋아주기' 평화훈련 워크숍: 사진 스케치 3 빛나는호수 2018.02.13 5401
19 '서로에게 힘을 북돋아주기' 평화훈련 워크숍: 사진 스케치 2 빛나는호수 2018.02.13 5245
18 '서로에게 힘을 북돋아주기' 평화훈련 워크숍: 사진 스케치 1 빛나는호수 2018.02.13 5390
17 [나딘과 함께] '서로에게 힘을 북돋아주기' 평화훈련 워크숍 빛나는호수 2018.02.13 5438
16 [나딘과 함께] 강정 이주민 지킴이들과의 미니워크숍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빛나는호수 2018.02.13 5135
15 [나딘과 함께] 평화의 문화를 교육의 현장에 가져온다면? 빛나는호수 2018.02.13 5223
14 [나딘과 함께] 저녁 강연회 ‘평화는 지금’ 빛나는호수 2018.02.13 5359
13 2018년 1-2월 국제평화실천가 나딘 후버 초대 강연 및 워크숍 안내 빛나는호수 2018.02.13 5681
12 ["2017 평화콘서트" 한국전쟁을 기억하며 <끝나지 않은 이야기> 함께주셔서 고맙습니다] 17. 06. 2… 센터알리미 2017.07.11 5404
11 강정평화학교&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 공동주최 살아있는 시민학교 8강 안내 빛나는호수 2017.06.30 5691
10 강정평화학교&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 공동주최 살아있는 시민학교 7강 스케치 빛나는호수 2017.06.30 5401
9 강정평화학교&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 공동주최 살아있는 시민학교 6강 스케치 빛나는호수 2017.06.20 5591
8 강정평화학교&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 공동주최 살아있는 시민학교 5강 스케치 빛나는호수 2017.06.17 5769
7 제4회 동북아시아 화해를 위한 크리스챤 포럼 재일교포 김신야 목사님 증언내용 센터알리미 2017.06.16 5514
열람중 제4회 동북아시아 화해를 위한 크리스챤 포럼 강우일 주교님 발표내용 센터알리미 2017.06.16 5453